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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관련 몇가지

룽마 2009. 10. 27. 18:07

1. 안중근의 10.26과 박정희의 10.26

    10월 26일. 안중근의사가(1879~1910)가 95년 전 하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조선 민족의 이름으로 저격한 날이다. 그러나 10.26을 “안중근 의거일”로 기억하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도리어 대다수 한국인은 10.26을 “박정희 서거일”로 기억하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안중근의 10.26은 “자랑스럽고 의로운 날”이고 

    박정희의 10.26은 “부끄럽고 창피한 날”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안중근은 가해자이고 박정희는 피해자라서? 

    그러나 그것 또한 정확한 분석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일본군의 칼날과 작두에 목이 잘린 채 잔혹하게 죽어간 수많은 한말 의병들, 공작정치에 의한 

    수많은 민주투사의 실종과 죽음을 두고 그런 말을 꺼낸다는 것은 

    스스로 역사의 백치나 청맹과니임을 자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중근의사가 여전히 “일반 국민 대중 속의 안중근”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일부 우익 보수 속의 

     안중근”으로 축소된 채 박제화 됐다는 것, 이 나라의 여론을 장악한 기득권 세력의 가슴에 안중근보다 

     박정희가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 등에서 보다 정확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2. 평화주의자 안중근

    ① 한국인 안응칠 소회 - 서면 답변서

         "하늘이 백성을 내어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되었다. 

         각각 자유를 지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가진 떳떳한 정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으레 문명시대라고 일컫지마는, 나는 홀로 그렇지 않은 것을 탄식한다.

  

         무릇 문명이란 동양과 서양, 잘난이와 못난이,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여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그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시대는 그렇지 못하여, 이른바 상등사회의 고등인물들은 의논한다는 것이 경쟁하는 

         것이요, 연구하는 것도 사람 죽이는 기계다. 그 때문에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끊일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닐 것이냐.

  

         이제 동양 대세를 말하면 비참한 현상이 더욱 심하여 참으로 글로 쓰기가 어렵다. 

         이른바 이등박문은 천하 대세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장차 멸망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슬프다! 천하 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 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총 한 방으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늙은 도적 이등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 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②  박은식선생의 "안중근전"

          “안중근은 역사(행적)에 근거하면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한 ‘지사(志士)’라고 말할 수 있고, 

           또한 한국을 위하여 복수한 ‘열협(烈俠; 義烈士)’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이 안중근을 다 설명하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세계적인 안광(眼光; 식견을 뜻함)을 가지고 스스로 평화의 대표로 나선 사람이다.”


          “대국적 평화를 파괴한 것은 실제로 이등(伊藤)의 침략주의 때문이다. 

           그를 죽이게 된 것은 안중근이 세계의 평화를 희망하고 이등을 평화의 공적(公賊)으로 인정하여 

           그 괴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화를 막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이 논할진대 안중근은 세계적 안광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평화의 대표를 자임한 자이다.”


3. 가족들

    ① 친족

         - 안중근의사 가족  부인 김아려여사(46년 상해에서 사망)

         -  슬하에 2남 1녀를 둠

           ' 장녀 안현생(60년 사망) - 두딸 황은주·황은실씨

           ' 장남 안분도(우생)  (11년 사망 - 독살이라고...)

           ' 차남 안준생 (52년 사망) - 정옥녀와 결혼 (1남 2녀)

             아들: 안웅호 , 딸 안선호 , 딸 안연호

          -  장남의 살해와 차남의 친일행적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88&aid=0000141043

     ② 일가 친척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이후 안 의사 일가는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만주 등 해외로 

          뿔뿔이 흩어지는 신세가 됐다.

          그 중 친동생 안정근(定根)과 안공근(恭根)은 형의 유지를 받들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해서지역(황해도)에서 토벌군과 동학군 대장으로 맞섰지만 외세에 맞서기

          위해 손을 잡았던 안 의사의 부친 안태훈(泰勳)과 김구의 인연 때문에 두 사람은 백범의 측근으로 활

          동했다.

  

           안 의사의 마지막 유언을 들으며 독립투사가 된 안정근과 안공근의 자녀들도 대를 이어 김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안정근의 차녀 안미생(美生)과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禹生)이 각각 백범의 맏며느리와 비서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해방후 외세를 등에 업은 이승만과 친일파에 의해 백범이 밀려나자 두 사람은 북한으로 

           가버린다.

  

            안 의사의 백부 안태현(泰鉉)의 장남 안명근(明根), 숙부 안태민(泰敏)의 장남 안경근(敬根), 

            숙부 안태건(泰健)의 손자 민생(民生)도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안명근이 독립운동 때문에 

            일제시대에 갇혔던 서대문형무소에 안경근과 안민생이 4.19혁명 이후 통일운동에 나섰다는 이유로

            5.16쿠데타 이후 투옥된 것이다. 

            더욱이 안경근은 일제시대에 투옥 중 탈옥을 했다가 체포돼 발목까지 잘렸던 비운의 인물이다.

  

           그랬던 독립투사 안경근과 그를 옆에서 보좌했던 안민생은 1961년 이른바 혁명재판소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4. 기타

     남산공원 안중근의사 기념관 옆에 서 있는 안의사 동상은 친일파 조각가로 알려진 김경승이 세운것이다


참 씁쓸하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