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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 - 헨리 홉하우스

룽마 2010. 2. 18. 11:23

이 책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

즉 씨앗(식물)이 역사적 변화를 일으킨 숨겨진 동인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16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4백 년이라는 기간 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식물은 이 책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에서 다루고 있는 5가지 종류들(키니네·설탕·차·면화·감자) 이다.
씨앗을 둘러싼 인간의 욕구와 그에 따른 크고 작은 변화들.
저자 헨리 홉하우스는 이 책을 통해 “세계는 인간의 의지로부터 비롯된 행위를 통해서만 진보할 수는 없으며, 자연은 우리의 진보를 중단시킬 수도 있고 진척시킬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1. 열대림을 개척한 키니네
키니네는 유럽, 아시아, 서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말라리아의 치료제로 쓰였다. 온갖 질병으로 둘러싸인 열대 지역에 백인들이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키니네 덕택이었다. 그밖에도 2천만 명이라는 거대한 인구 이동을 촉진시켰고, 합성 화학의 본격적인 탐구도 키니네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2. 카리브해를 검게 물들인 설탕
설탕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행해졌던 악명 높은 노예 무역의 원인이었다.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는 서인도 제도에서 재배되었으며, 흑인들은 혹독한 서인도 제도의 기후 조건 속에서 일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3. 아편 연기에 스러진 차향
차는 동양 무역에서 향료 다음으로 중요한 품목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기 몇 세기 전만 해도 유럽 문화는 아주 미개한 수준이었던 반면, 중국은 고도로 세련된 문화를 영위하고 있었다. 차는 이처럼 발달된 문명을 누리던 중국의 쇠퇴를 가속화시켰으며, 1세기 이상 아편과 교환됨으로써 범죄 행위를 유발시켰다.

4. 남북을 갈라놓은 면화
미국 남부에 도입된 면화는 점차 쇠퇴해가던 노예 제도에 활기를 되찾아 주었고, 여러 주에 정치, 경제적 존재 이유가 되는 환금 작물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75년 후 면화와 노예 제도는 미국을 남북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5. 신대륙 이주를 부추긴 감자
사람들은 감자를 아일랜드 역사, 특히 1845 년~1846년 사이에 발생했던 대기근과 연관짓곤 한다.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과 미국으로의 집단 이주, 영국의 자유 무역 채택 등 감자가 영국, 아일랜드 그리고 미국의 혼란스런 상호 관계에 끼친 영향을 생생히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시각, 즉 역사를 이끌고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 주체로서 인간을 파악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역사를 바꾼 씨앗’의 전파자로서 인간을 역사의 한 걸음 뒤로 물러세우고 있다.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지는 인간들. 하지만 그들에게 한 마디 격려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인간이 있었기에 그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키니네에 대한 부연설명

 

지금까지 지구상의 모든 전쟁과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보다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
기원전 3세기에 세계 정복 도상에 있었던 알렉산더 대왕도 33세에 말라리아로 죽었다.
만일 알렉산더가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역사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1500년경 남아메리카의 페루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예수회’ 신부들은, 원주민들이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에게 ‘키나’라고 하는 나무의 껍질을 달여 먹이고 완치시키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후 1630년경 유럽에 말라리아가 대대적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신부들은 곧 키나 나무껍질 분말을 유럽에 보냈다. 그러나 유럽의 왕립의과대학 교수들과 의사들은 의학계 전문가도 아닌 신부들이 보낸 약초를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키나를 ‘예수회 분말’이라고 이름을 붙여 경멸하고 그 사용과 유통을 방해했다.
그러나 당시 위대한 가톨릭 지도자 존 드 루고 추기경은 말라리아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키나 보급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1649년부터 1690년까지 의학계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온갖 캠페인을 벌여, 키나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선물이라고 역설했으나 끝내 싸움에 패배하고 말았다.

1670년대에 영국의 런던과 남부 바닷가에 말라리아가 창궐했다. 이때 약방에서 조수로 일한 경험이 있는 ‘탈보’란 사기꾼이 키나 분말을 자기가 발명한 말라리아 특효약이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이것을 복용한 사람들은 백발백중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의사들은 말라리아 환자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볼 뿐 탈보 특효약을 쓰지 않았다. 이때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왕 찰스 2세가 말라리아에 걸린 것이다. 그는 당장에 탈보를 불러들였고 곧바로 말라리아에서 나았다. 그후 태양왕이라 불리던 프랑스 루이 14세의 황태자가 말라리아에 걸렸다. 루이 14세와 친분이 있던 찰스 2세는 탈보를 루이에게 급파하였다. 그리고 탈보에 의해 황태자는 단시일에 생명을 건졌다.
탈보는 1681년에 죽었는데, 죽은 후에야 그의 비방약이 바로 키나 분말임이 밝혀졌다. 전유럽의 의학계는 자신들이 그토록 반대하여 역사 속에 영원히 침몰시켰다고 의기양양해했던 바로 그 예수회 분말에 결정타를 맞은 것이다.

1820년에 프랑스의 젊은 의학도 조세 페트리에와 조세 카반드가 키나 분말에서 키니네란 유기화합물을 추출하였다. 그때부터 키니네는 전세계에 보급되었다.
1630년경 페루의 신부들이 키나가루를 유럽에 보낸 때로부터 프랑스의 풋내기 의학도가 키니네를 추출하여 전세계에서 공인되기까지 2백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셈이다. 예수회 신부에서 루고 추기경, 돌팔이 탈보, 그리고 젊은 의학도의 키니네 추출까지 실로 희비극이 얽힌 드라마는 의학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의학의 발달이, 그 기득권자들의 반동으로 얼마나 음울한 역사를 되풀이하는가는 현대의학에서도 수없이 볼 수 있다. 무수한 사람들을 난치병에서 구원한 알로에나 자연의학도 얼마나 고달픈 전쟁을 겪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